찬미 예수님.
이번 주 한 주간은 깨어 기다림에 대한 복음말씀입니다.
특별히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을 이번 주간에 합니다.
평일 미사에 못 오시는 분이 많으셔셔,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올려 드립니다.
연중의 끝자락에 거룩한 종말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95,2-3: PL 54,46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겸손의 축복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한 가운데서 온유함과 친숙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풍요 가운데서 교만과 친숙해집니다. 그래도 많은 부자들 가운데서는 자신의 부유함을 오만하게 허세 부리는 데에 보다 선행을 하는 데에 사용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궁핍과 고통을 위로해 주기 위해 베푸는 것이 커다란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덕행에서 온갖 계급과 상태의 사람들이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내적 상태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 가치에 있어서 동일해질 때에는 세상 물질의 소유에 있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는 것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적 재화에 대한 사랑이 놓는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고 세상 재물의 증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오히려 천상 보화의 부요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가난은 참으로 복됩니다.
이런 관대한 가난의 모범을, 주님을 따른 첫 사도들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천상 스승의 부르심에 따라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즉시 변모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을 본 딴 이들을 자신들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교회의 첫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소유한 모든 것들에서 멀어지고 영신적 가난을 통해서 천상 보화로 부유해지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된 사도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가는 도중 앉은뱅이가 그에게 애긍을 청할 때, 그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겸손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 가난보다 더 부유한 것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금전적으로 도와줄 능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연이 주는 선물을 갖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약질로 태어난 그 사람을 베드로는 말씀으로 치유시켰습니다. 카이사르의 모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지 못한 베드로는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모상을 다시 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혜택을, 다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사도가 행한 기적적인 치유로 말미암아 믿게 된 오천 명의 사람들도 누렸습니다. 애긍을 청하는 사람에게 줄 돈이 하나도 없었던 이 가난한 사람은 영신적 은혜를 너무도 풍성히 베풀어 주어 한 인간의 지체를 고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마음도 치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때까지 제대로 걷지 못했던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훌륭히 걸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95,4-6: PL 54,462-464)
그리스도의 나라의 복락
주님은 가난의 복됨에 대해 말씀하신 후 덧붙여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영원한 위로의 약속을 받는 이 슬픔은 이 세상의 슬픔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통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성인들의 애통의 본질도 그와 다르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눈물의 원인도 그와는 다릅니다.
종교적인 슬픔은 자기 자신의 죄와 타인들의 죄에 대해 우는 데에서 흘러 나옵니다. 그 슬픔은 하느님의 정의가 죄에 대한 책벌을 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악이 일으키는 죄과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의 태도는 그 악행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자의 상태보다 더 개탄할 만합니다. 악은 죄인을 책벌 가운데로 밀어 넣고 인내심은 의인을 영광에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덧붙여,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하고 양순한 사람들, 겸손하고 순박한 사람들, 그리고 온갖 모욕을 참아 낼 마음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땅의 차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유산을 가치 없고 덧없는 것으로, 즉 천상 본향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온유한 사람들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 약속되고 양순한 사람들이 유산으로 받을 이 땅은 그들의 겸손이 쌓은 공로와 복된 부활로써 변모되고 불사 불멸의 영광으로 장식될 그들의 몸을 뜻합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육신은 그들의 영혼과 절대로 대립되지 않으며 영혼의 의지와 완전히 일치될 것입니다. 그때 외적 사람은 내적 사람의 거룩하고도 화평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영구한 평화 속에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들의 권리는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위험은 상급으로 변화되고 짐이 되었던 것은 영예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95,6-8: PL 54,464-465)
그리스도인의 지혜
그 다음 주님은 덧붙여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림”은 육신적 주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목마름도 물질적 음료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충족을 옳은 일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갖 신비의 심부에까지 들어가 주님 자신으로 충만되기를 욕구합니다.
정의의 양식을 탐하고 그런 음료를 목말라 하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가 이미 조금이라도 그 감미로움을 맛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욕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하는 말씀을 듣고 천상 감미로움의 한 몫을 취하고 지극히 순수한 이 욕망으로 불타올라 현세적인 모든 것을 멸시하고 정의를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망으로 심취해 있을 뿐 아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가는 계명의 진리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뒤따르는 것처럼, 여기서는 옳은 일에 주리는 복됨에 자비의 덕행이 뒤따릅니다. 주님은 이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신 지혜의 위엄을 인식하여, 어떤 가르침과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떤 상급으로 부름 받았는지 생각하십시오. 자비 자체이신 분은 당신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고, 정의 자체이신 분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창조주께서는 피조물에 반사되시고 하느님 모상은 하느님 자신의 모상대로 조성된 인간의 마음에 거울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의 신앙은 굳건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욕구들이 성취되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영구히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애긍 시사함으로써 당신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복락에 도달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형제 여러분, 그렇게도 위대한 상급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위에서 말한 덕행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 이것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행복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누가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 본성이 변모될 때 이 목적을 달성하여 하느님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가 아니고, 그분의 얼굴을 맞대어”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그러한 식으로 볼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은 영원한 관조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95,8-9: PL 54, 465-466)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크나큰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느님을 뵙는 복락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약속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실상 더러움으로 가득 찬 눈은 참 빛의 광명을 바라보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기쁨이 될 것이 죄로 물든 사람에게는 조롱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인 헛된 것의 암흑을 멀리하고 영혼의 눈이 죄의 모든 허물에서 깨끗이 씻어져 우리 깨끗한 눈이 하느님의 위대한 영상을 즐기도록 합시다.
이 목적에 다다르는 데 채비가 갖추어지도록 다음의 복락이 뒤따르는 것으로 나는 보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복락은 어떤 일반적인 상호 조약이나 어떤 통상적인 화평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은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고 할 때에 뜻하는 평화와, 예언자가 “당신 법을 괴는 이는 평화도 흐뭇하여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삽나이다.”고 할 때에 뜻하는 평화입니다.
우정의 가장 밀접한 유대도, 성격의 완전한 동일성도,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의지와 조화되지 않는다면 이 평화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악한 욕망에다 기초를 두는 우정, 범죄를 하기 위한 공동 유대 및 죄스런 협약 등과 같은 것은 물론 이 위대한 평화에서 제외됩니다. 세상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육신을 따른 출생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하느님께 고정시키는 사람들은 “평화의 유대를 통해서 마음의 일치를 보전하는 데 노력하고” 영원한 법에서 절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충실한 신앙으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고 덕행에서 한 마음이 되며 거룩함에서 일치하여 영원토록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이들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상급입니다. 이와 같은 이들은 결코 재난의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유혹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온갖 유혹과의 투쟁이 끝날 때 하느님의 지극히 고요한 평화 속에 안식할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님을 통하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