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6주일(요한 15,9-17) 강론

by 비안네신부 posted May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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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한 주간 쉬어 가기흐름 속에서 평화를 잘 지키셨는지요?

본당은 내적으로 미사 성제 가운데 신자분들의 가정평화를 늘 기억하고 있고, 외적으로는 성전 자리 정돈과 창문 외형정돈, 회합실 선풍기 재정비를 통해서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 공간을 통해서 강론 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관능적인 사랑도 있고, 이기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 2독서, 요한 제1서는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4,10)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흐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라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관대하지만, 대단히 제한된 관대함입니다. 걸핏하면 철회되는 관대함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세상에 따라서 상상합니다. 인간은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인류가 세상에 살면서 발견한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울 때도 있었지만, 두려울 때가 더 많았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위협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체험으로 하느님에게 의지하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미움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 곧 지켜야 한다, 바쳐야 한다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거나 제물 봉헌에 불충실하였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으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여 제거할 때도 예수님은 그 하느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가 유산으로 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비로운 마음, 축복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서 안에도 하느님에 대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10,43.45) 등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유대교 안에서 통용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초기 교회가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갖다 쓴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고 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제압하고 압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욕구 충족을 찾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말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마치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겸손하게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겸손하게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크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애완동물로 자신을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낮추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에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횡포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자신을 낮추신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이웃과 함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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