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찬미 예수님.
기쁨 주일에 참 신앙으로 참 기쁨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저희 공동체가 있는 곳에 확진자가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건강을 잘 돌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웃은 병균을 전하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창조물임을 기억하고, 나의 생각 속에서 존중과 배려, 사랑과 일치를 더 고취시키도록 합시다.
‘하느님처럼’(이제민 신부)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너무 많은 감명을 받아 사순4주일에 우리 신자들께 전합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그렇게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처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다(1,27). 진흙과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인데도 하느님처럼 지어진 존재,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존재, 그게 인간이다. 이 인간을 창세기 2장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 흙의 먼지로 빚어진 인간이 하느님의 숨을 쉰다.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이는 인간에 대한 정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시사해 준다.
인간은 비록 흙과 같고 아침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하느님처럼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나처럼 품위 있는 존재이기에 하느님처럼 품위 있게 대해야 한다. 인간만이 아니다. 세상 만물도 하느님 대하듯 대해야 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귀한 창조물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상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세상 만물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대하며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서 하느님의 영을 느끼며,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 창조를 창조 발전하며 살아가도록 돌보아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느님처럼 만물에 선하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살아야 하며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살 때 참 인간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선하고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사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는데도 하느님처럼 살지도 못할뿐더러 남들 또한 하느님처럼 대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왜 인간은 자기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잊는 것일까? 온 세상이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사랑스러운 창조물인데도 왜 그것들을 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느님처럼 살아야 할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죄란 말인가? 여기에 인간의 술수가 있다. 그 술수가 뱀과 같이 영악하고 교묘하다.
“하느님처럼 산다.”라는 것은 하느님처럼 품위 있게 살며 인간과 온 세상 만물을 하느님 대하듯 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자는 ‘하느님처럼’을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이 오르는 것으로 여기며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세상 만물을 지배하고 세상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대하면서 착취하는 폭군이 되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는 하느님을 세상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대하는 폭군으로 만든다. 하느님은 그런 폭력으로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런 폭군으로 인간을 경계하시지 않는다. 유혹자는 선하신 하느님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든다. 폭군은 세상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리는 잣대로 대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사물의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 그 사물을 내신 하느님의 순수한 마음을 읽지를 못한다. 사물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듣지 못한다. 때때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하느님의 마음은 느끼지 못한다. 하느님은 그런 폭군의 잣대로 세상을 대하지 않는다. 이런 잣대로는 하느님처럼 살 수 없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인간답게, 진정으로 하느님처럼 사는 법을 가르친다. 사순절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졌으면서도 하느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나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만나게 한다. 하느님처럼 대하게 한다. 하느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죄다.
예수님은 이 죄를 씻어주신 분이다. 어떻게 씻었는가? 스스로 하느님처럼 살아가심으로서 씻어주셨다. 하느님처럼 산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세상에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선하시고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사는 것이다. 이 삶은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다. 세상 만물에서 하느님의 숨을 듣지 못한다면 숨을 자기의 숨으로 여기며 자기의 숨소리를 크게 내려 한 때문이다. 온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세상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면 세상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배하고 정복하는 마음은 세상을 착취하며 폭력을 가할 뿐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창조물로 대하기 위해서는 이런 폭력적인 마음을 죽여야 한다.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처럼 되라고 할 때는 자기를 바치는 온전한 자기희생이 없다. 오히려 남의 희생을 부추긴다. 예수님은 남을 희생시키려는 이런 마음을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극복하셨다. 오늘 복음(마태 4,1-11)에서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셨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해준다. 이로써 그분의 신적인 삶을 보여 준다. 그분의 신적인 삶은 우리가 모두 살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삶이다.
남을 희생시키려는 마음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이런 마음은 드디어는 하느님을 대신하려 들면서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이런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에 대해서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자기의 명예를 추구하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을 그런 식으로 경배하지 마라.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마음이 없이는 이 유혹을 이길 수 없다.
하느님처럼 창조되었으면서도 하느님처럼 살지 못하고, 그래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사순절의 교회는 화답송에서 시편 51을 들려준다. “주님, 주님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하느님, 주님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주님의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주님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주님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시편 51)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수난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멘.